IVF학사회 소식지인 <소리>에 실린 제 글입니다.

은율이와 함께 한 긴 방학의 알파와 오메가를 쓰느라 조금 길어졌습니다.

http://ivfgcf.tistory.com/314 (링크 오류로 전체 글 퍼옵니다.)


열여섯 살, 꽃다운 친구들에게 주는 선물




엄마: 은율아, 너 중3 졸업한 후에 1년간 transition year1라는 거 해볼래?

  딸: 그게 뭔데?

엄마: 유럽 몇몇 나라에서는 고교진학 전에 진로탐색을 위해서 특별한 시간을 갖는 제도가 있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잘 하는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겠지. 솔깃하지 않니?

  딸: 그럼 학교 안 다니고?

엄마: 응. 아일랜드나 덴마크, 영국 등에는 그걸 위한 학교나 프로그램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으니까 개인적으 로 그냥 쉬면서 해야겠지?

  딸: 1년 뒤에는 한 살 어린 애들이랑 고등학교 다니고?

엄마: 그렇지. 1년 지내보고 혹시 고등학교 진학 외에 대안학교나 검정고시 등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딸: 에이~ 싫어. 학교 안 다니는 건 좋은데 결국 한 학년 꿇는 거잖아. 그건 싫어.

엄마: 그래? 싫음 말고... 뭐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거야.


2009년 봄, 중학교에 입학한 딸과 나눈 대화입니다. 저는 그 때 ‘사교육걱정없는세상2’이 개설한 ‘등대지기학교’ 강의를 듣고 있던 수강생이었습니다.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그간 헐렁하게 해온 엄마노릇을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부담을 가진 시점이었고요. 그전까지는 애써 외면해오던 동네의 목소리 큰 아줌마들의 사교육정보가 귀에 꽂히면서 팔랑귀가 되어 우왕좌왕할 때였는데 등대지기학교가 이 학부모의 정신줄을 잡아주었습니다. 어떤 분의 강의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이 바로 ‘transition year’, ‘gap year’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바로 딸에게, 남편에게 전해준 것이지요. 딸은 부정적이었지만, 남편은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린 귀로 들어주었습니다.


중학교 첫 시험인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아이의 어깨너머로 요즘 교과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어떻게 공부하는지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세상에나, 책은 훨씬 세련되어졌지만 30년 전 제가 공부하던 방식과 다를 바가 없이 대부분의 과목을 달달 외워야 하더군요. 즐거운 배움과 깨달음은 없고 오로지 입시를 위해 공부 기계가 되어 문제집을 풀며 중고등학교 6년을 보낼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목표나 동기가 없이 그저 좋은 성적을 위해 꽃다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러나 제도교육을 벗어나 홈스쿨링이나 대안학교 등으로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저의 귀차니즘이나 기타 여건 등으로 보아 가능성 10%도 되지 않는 옵션이었기에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망가지지 않게 잘 버티는 쪽으로 방향을 가다듬어야겠다, 정도만 마음먹었지요. 그러던 차에 매우 적절한 강의를 접한 셈입니다. 고교진학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알아보고 공부의 이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신만의 답을 가질 수 있다면, 고교 3년을 보낼 넉넉한 동력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jarmoluk(pixabay.com)



그 다음해, 2학년이 된 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이 살짝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아이에게 3학년 여름방학까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보자 제안하고, 우리 가족은 이후 1년 동안 이따금씩 그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부모인 우리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소위 ‘견적’을 내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저는 아일랜드처럼 3가지 정도의 관심직업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런 시간이 진로탐색과 학업 동기부여에 매우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딸의 경우, 음악에 관심이 있어 보이니 뮤지컬이나 방송음악 등 관련된 곳에서 비록 허드렛일을 하더라도 곁에서 기웃거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었던 거지요. 결과적으로 딸아이는 부모의 격려에 힘입어 안식년을 작정하고 고등학교 배정신청을 보류했고, 1년간 무소속 청소년으로 자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처음에 제안했던 직업체험 기회는 현실적 제약이 많아서 쉽지 않았고, 결국 그 시절 아이는 강아지 기르기, 드라마 시청하기, 음악/미술학원 다니기(각각 겨우 두 달씩), 약간의 책읽기, 사진 찍기, 아빠와 함께 여행하기, 엄마와 동네도서관 가기, 집안 살림 돕기 등이 일상이었답니다. 저는 그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야간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주경야독 학생이었기에 백수인 딸이 참으로 쓸모가 있었습니다.


모든 삶에서 ‘빨리 빨리’를 외치며, 학습조차 몇 년씩 선행을 해야만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 이 무시무시한 정글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관되게 빈둥거리는(듯 보이는) 아이를 한두 달도 아니고 열 달씩 지켜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예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것은 단연코 ‘잠’이었거든요. 그러니 딸이나 우리 부부에게 종종 불안이 밀려드는 겁니다. 규모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 괜히 시작했나, 이러다 고등학교 가서 뒤쳐지는 거 아닌가 등등. 용감하게 시작했으니 그래도 끝까지 가보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흘러가는 대로 더 두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는데, 이는 고3이 된 현재까지 마음의 불을 지피는 땔감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딸의 안식년을 곁에서 지켜본 엄마로서 제가 배운 것은 ‘불안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비법이 있는지 물으신다면 변변히 드릴 말씀은 없고요. 제 짧은 경험으로는 좌충우돌하는 아이 옆에 ‘그저 버티고 있기’밖에 다른 방법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불안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버티다 보니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났고, 그 시간은 아이에게 앞으로 또 본의 아니게 다가올지도 모를 불안한 시간을 엄마로서 바라보며 견딜 내공을 길러주지 않았나 조심스레 평가해봅니다. 이 시대 부모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많이 고민하고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딸에게 남다른 1년을 제안하고 허락한 저 또한 어떤 면에선 자녀교육에 뭔가 특별한 열심 또는 흑심을 품은 사람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온갖 사교육에 올인한 부모들이나, 일 년간 푹 쉬는 시간을 제공한 저희 부부나 기저에는 ‘자녀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똑같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단, 열심이 있는 부모일수록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방향이 잘 잡혀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그 방향은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힘을 갖추게 하는 것이고, 내 품에 있을 때 이런 자유롭고 느긋한 쉼을 잠시 누리며 ‘자가발전’하도록 내어버려두는 것이 부모역할이라고 생각했기에 딸아이에게 쉼을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청소년 부모로서의 발달과업을 성취하느라 부모로서 힘 빼는 데 힘을 썼습니다. 무심코 써놓고 보니 참 역설적입니다만, 좋은 부모 되기 위해서 우리 부모들은 기본으로 힘을 잔뜩 주고 있기 때문에 힘을 빼려면 무척 힘이 듭니다. 자녀양육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으면 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요. 많이 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뺄 힘이 남아있음을 저는 요즘도 종종 경험합니다. 



ⓒUnsplash(pixbay.com)



제 딸아이의 특별한 경험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된 지인들이 이것저것 궁금해 하시더군요. 혼자 하자면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청소년들이 함께 모이면 덜 막연하고 또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봄부터 남편과 함께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서울시교육청에서 ‘오디세이’라는 고교자유학년제 프로그램3에 시동을 걸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도권에서도 무모한 입시경쟁 시스템에서 고통 받는 청소년들과 부모들의 소망을 감지하고 장을 열어준 것입니다. 또한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에서 덴마크의 인생설계학교(After school)4를 소개하며 인생의 전환기마다 인생을 설계하는 시간을 갖도록 돕는 인생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한번 학교에 입학하면 대학 입학까지 무조건 앞으로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옆을 봐도 괜찮다고, 옆을 보는 게 필요하다는 시각이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바람직한 분위기입니다.  


우리 부부가 준비하는 ‘꽃다운 친구들’(이하 ‘꽃친’)은 다음 세대를 위해 창의적인 휴식을 제공하는 과정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교 진학 전 1년 동안, 고교배정을 미루고 학업을 쉬면서 부모와 함께 진로탐색과 인생설계는 물론 자기탐구 및 시험걱정 없는 공부, 봉사와 여행, 친구사귀기와 놀이 등을 통해 열여섯 살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에게 자기 호흡으로 숨 쉬게 하는 1년짜리 긴 방학 프로그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2~20명, 한 클래스 정도의 중졸(?) 남녀 아이들과 1월부터 12월까지 정기적으로 주 1~2회 정도 만나면서 자발적인 과제 중심으로 부모와 함께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는 시간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어떤 분 말처럼 부모를 위해 “공부해 드리는”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유로 공부하는 꽃다운 친구들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기간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남편 말을 빌리자면, 이런 모색들이 입시서열주의라는 제국의 질서에 의미 있는 균열을 내는 영악한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 ‘꽃친’ 부모님들은 자녀 한명을 위한 시도이지만 장차 이 나라의 미친 교육열을 식혀주는 흐름에 한몫을 하게 되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꽃친’은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처럼 일 년간 빡쎄게 진로를 개척하는 기숙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앞장서고 있는 ‘자유학기제’와도 다르고, 1년간 대안교육 프로그램을 학과목과 동시에 제공하는 ‘오디세이학교’와도 다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겨울방학에 3개월 정도 합숙하며 집중해서 인생을 고민하는 ‘인생학교’와도 다릅니다. 1년을 통째로 쉬는 개념입니다. 뒤서가면서 인생의 호흡을 고르려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꽃친 블로그(kochin.tistory.com)에 채워갈 예정입니다.



ⓒstrecosa(pixabay.com)




은율이 안식년 뒷이야기

  

엄마가 품은 최초의 흑심이었던 아이의 진로체험은 애초에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1년간 내세울 만한 특별한 성취도 없어 보여 딸의 안식년에 대해 내심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물론 그런 걸 의도한 것도 아니면서 은근히 기대하던 얄궂은 엄마 마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공립고교 진학 후 1년을 보낸 어느 날, 부녀간 심야토크에서 한 딸의 이야기가 제 무릎을 치게 하더군요. “우리 반 동생들이나 한 학년 위 내 친구들 모두 너무 개념 없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학교생활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다가 입시 앞두고, 대학에 가서, 아니면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하다가 멘붕되고 인생고민하면서 멍 때리는 시간이 있을 거 같아. 근데 나는 작년에 미리 멍 때리는 시간 넉넉히 가져서 참 다행이야.” 아이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쉬는 동안 실컷 멍 때리며 실패와 한계를 맛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해볼 수 있었고 부모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여유를 누릴 수 있었고요. 느릿느릿한 걸음이었기에 하나님 사랑을 이전보다 진하게 맛보았고 이웃과 세상을 돌아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그렇게 성장했다고 믿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진짜 성장인 그런 성장 말이지요. 그래서 앞길이 창창하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앞으로 다가올 실패를 견딜힘을 장착한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수진

20년째 엄마노릇하며 고3 딸과 중2 아들,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출산 후 10년간 경력단절여성으로 지내다가  나에게 맞는 일을 슬금슬금 찾아가는 중.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부모대상 강의와 가족상담을 조금씩 하는 프리랜서인데, 앞으로는 '꽃다운 친구들' 대표라는 타이틀로도 불릴 예정이라 살짝 심장이 쫄깃한 상태로 '꽃친' 자원봉사자인 남편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 


















VOL.221│2015.08+09

교육, 새로운 바람




 


  1. 영국(Gap Year)이나 아일랜드(Transition Year)에서는 잠시 학교교육을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탐색, 인턴, 창업 등의 활동을 경험하여 향후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창조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Gap Year) 등의 일부 대학에서는 우수 학생들이 중도에 대학교육을 포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학 전후에 자신의 능력, 전공, 향후 진로나 직업을 탐색할 수 있도록 일정한 휴식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 출처: 글로벌 리포트 아일랜드 전환학년(Transition Year) 프로그램의 성과와 시사점, 윤형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 [본문으로]
  2.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비교육적 입시 사교육 부담의 근본 원인을 제거함으로 행복한 교육을 만들고자, 국민들 스스로가 전개하는 자발적 대중 운동이다. - 출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식 홈페이지 [본문으로]
  3. 오디세이 학교는 고1 학생들에게 획일적인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삶을 돌아보며 진로를 탐색할 시간과 여유를 주고 창의적, 자율적인 대안교육과정을 통해 학습 의욕과 학업능력을 갖춘 학생으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 미래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창의적인 진로 개척 역량과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율적 시민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체험 중심의 교육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본문으로]
  4. 덴마크에서는 약 40퍼센트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Afterschool(인생설계학교)에서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지 설계한다. 대부분 기숙학교 형태의 학교를 선택한다. 종합교육을 하는 곳도 있고 체육, 음악 등 특별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곳도 있다. - 출처 :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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